궁성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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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궁성 사건은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결정에 반발한 육군 장교들이 천황의 항복 칙령 발표를 막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 미수 사건이다. 포츠담 선언 수락이 결정되자, 하타나카 겐지 소좌를 중심으로 한 육군 장교들은 궁궐을 점거하고 요인을 암살하려 했으나, 다나카 시즈이치 동부군 사령관의 설득과 하타나카의 자결로 실패했다. 이 사건은 일본 패망 직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관련 인물들의 자결, 군 조직 해체 등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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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성 사건 | |
---|---|
사건 개요 | |
명칭 | 궁성 사건 |
로마자 표기 | Kyūjō Jiken |
발생 장소 | 서울 고지마치구 궁성(황거) |
날짜 | 1945년 8월 14일 - 8월 15일 |
시간 | 불명 |
유형 | 쿠데타 미수 |
목표 | 일본의 항복 저지 히로히토 천황을 가택 연금 히로히토 항복 방송 녹음 파괴 스즈키 간타로 총리 암살 |
충돌 정보 | |
관련 사건 | 일본의 항복 |
결과 | 쿠데타 실패 |
교전 세력 | |
주도 세력 1 | 일본 쿠데타군 |
주도 세력 2 | 일본 정부 |
지휘관 1 | 하타나카 겐지(사망) 시자키 지로(사망) 이다 마사타카 사사키 다케오 |
지휘관 2 | 스즈키 간타로 기토 고이치 다나카 시즈이치 모리 다케시(사망) |
병력 1 | 18,000명 반란군 687명 장교 |
병력 2 | 25,000명 병력 |
사상자 1 | 4명 자살 |
사상자 2 | 2명 사망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하타나카 겐지 (쿠데타 지도자) |
상세 정보 | |
원인 | 일본의 항복(옥음 방송) 저지 |
수단 | 쿠데타 |
사용 무기 | 불명 |
공격 인원 | 불명 |
표적 | 불명 |
사망자 | 모리 다케시 육군 중장 시라이시 미치노리 육군 중좌 |
부상자 | 불명 |
실종자 | 불명 |
피해자 | 불명 |
손해 | 불명 |
범인 | 육군 장교 여러 명 |
혐의 | 불명 |
동기 | 일본의 항복(옥음 방송) 저지 |
관여 | 불명 |
방어 | 불명 |
대응 | 다나카 시즈이치동부군관구사령관의 진압 |
사과 | 불명 |
배상 | 불명 |
2. 배경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5년 8월,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소비에트 연방의 참전으로 인해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 수락을 통한 항복을 고려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9일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 스즈키 칸타로 수상,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 도고 시게노부 외무대신은 천황의 지위 보장(국체 보존)을 조건으로 항복을 주장했고, 아난 미키 육군대신과 우메즈 미치로 참모총장은 추가 조건을 요구했다. 이후 어전회의에서 쇼와 천황은 도고 외무대신의 의견에 동의하여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했다.
연합국에 대한 연락은 스위스와 스웨덴 공사를 통해 이루어졌다.[4] 그러나 포츠담 선언의 "전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 조항[5]과 연합국의 답변 중 "천황과 일본 정부의 국가 통치 권한은 연합국 최고 사령관에 따르는 ('''subject to''')" 문구[6]에 대해 육군은 "예속하는 것으로 한다"고 해석, 천황의 지위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전쟁 계속을 주장하며 반발했다.
외무성은 해당 문구를 "제한 하에 놓이는"으로 번역하며 종전을 추진하려 했으나, 육군 내에서는 다케시타 마사히코 중좌 등이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에게 종전 저지를 요구하고 쿠데타 계획까지 제시하며 압박했다.
2. 1. 포츠담 선언 수락 결정
1945년 7월 26일 (베를린 시간), 포츠담 회의는 일본 항복 조건에 대한 선언을 발표했다. 포츠담 선언이 단파로 일본에 전달되자,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가 그 사본을 일본 천황 히로히토에게 가져갔다. 천황은 선언 내용을 조목조목 검토한 후 도고에게 그 조건들이 "상황을 고려할 때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예상되는가"라고 물었다. 도고는 그렇다고 답했고, 천황은 "나는 동의한다. 원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1]1945년 8월 9일, 일본 정부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소련의 선전포고에 대응하여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날, 최고 전쟁 지도회의가 일본 황실 앞에서 열렸다. 회의에서 총리 스즈키 간타로,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 그리고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는 히로히토에게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고 무조건 항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방공호 회의가 끝난 후, 스즈키는 천황 회의로서 최고 전쟁 지도회의를 다시 소집했고, 히로히토 천황이 참석했다. 8월 10일 자정부터 지하 방공호에서 회의가 열렸다. 히로히토는 도고의 의견에 동의하여 포츠담 선언 수용을 결정했다.[4] 그 후, 일본의 스위스와 스웨덴 주재 특사는 연합국에 그 결정을 통보했다.
2. 2. 육군 내부의 동요
포츠담 선언 수락 결정에 육군성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육군 장교들 사이에서는 계속 저항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5] 8월 12일 자정 이후 샌프란시스코의 라디오 방송국(KGEI)이 연합군의 답변을 전달했는데, 여기서 연합군이 일본 정부의 국체 보호 요청에 반대하여 일본 정부의 주권과 천황의 권위를 연합군 최고 사령관에게 종속시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는 패망한 독일 제국에도 적용되었던 군정 체제였다(점령하의 독일).[6]외무성은 "천황과 일본 정부의 국가 통치 권한은 연합군 최고 사령관에 따르는 ('''subject to''')"는 문구를 "'''제한 하에 놓이는'''"으로 해석하여 어떻게든 종전을 추진하려 했다. 반면 육군은 이를 "'''예속하는 것으로 한다'''"고 해석하여 천황의 지위가 보장되지 않았다고 여겨 전쟁 계속을 주장했다.[6]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육군 장교들은 국체 보호를 위해 쿠데타가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이들은 이미 도쿄에 일부 병력을 준비해 둔 상태였다(兵力使用計画|병력사용계획일본어). 8월 13일에서 14일 밤에 열린 천황 측근 회의에서 항복이 최종 결정된 직후,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은 우메즈 요시지로 육군참모총장에게 쿠데타를 일으켜서라도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지 물었으나, 우메즈는 "이제 천황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6]
결국 아나미는 천황의 칙령에 따를 것을 발표했고, 일본 육군참모본부 부총장 가와베 도라시로 장군의 제안으로 고위 장교들은 모두 천황의 항복 명령을 수행하기로 합의하는 서약서에 서명했다. 이 서약서에는 육군 장관 아나미,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제1군 사령관 스기야마 하지메 원수, 제2군 사령관 하타 슌로쿠 원수, 군사훈련 감찰관 도이하라 겐지 등이 서명했다. 육군 최고위 장교들의 이러한 서면 합의는 도쿄에서 쿠데타를 선동하려는 어떤 시도에도 강력한 방화벽 역할을 했다.
3. 주요 인물
이 사건은 일본의 항복 결정에 반발한 일부 일본 육군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 시도였다.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과 관련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이름 | 계급 | 비고 |
---|---|---|---|
천황 | 쇼와 천황 | ||
총리대신 | 스즈키 간타로 | 전 시종장, 해군병학교 14기 | |
육군대신 | 아난 미키 | 전 시종무관, 육군사관학교 18기 | |
해군대신 | 요나이 미쓰마사 | 전 총리대신, 해군병학교 29기 | |
외무대신 | 토고 시게노부 | ||
궁내대신 | 이시와타 쇼타로 | ||
참모총장 | 메이진 미지로 | 대장 | 육사 15기 |
전 총리 | 도조 히데키 | 대장 | 육사 17기 |
일본 육군성군무국 군사과장 | 아라오 오키타다 | 대좌 | 육사 35기, 관련 |
육군성 군무국 군사과 편제반장 | 이나바 마사오 | 중좌 | 육사 42기, 관련 |
육군성 군무국 군사과원 | 이다 마사타카 | 중좌 | 육사 45기, 주모, 자결 단념 |
육군성 군무국 군무과 내정반장 | 타케시타 마사히코 | 중좌 | 육사 42기, 발단 문서 작성 |
육군성 군무국 군무과원 | 시이자키 지로 | 중좌 | 육사 45기, 주모, 실패 후 자결 |
육군성 군무국 군무과원 | 하타나카 켄지 | 소좌 | 육사 46기, 주모, 실패 후 자결 |
제12방면군 겸 동부 군관구 사령관 | 다나카 시즈이치 | 대장 | 육사 19기, 반란 진압 지휘 |
제12방면군 겸 동부 군관구 참모장 | 타카시마 다쓰히코 | 소장 | 육사 30기 수석 |
제12방면군 겸 동부 군관구 참모부장 | 오누마 하루오 | 소장 | 육사 32기 |
제12방면군 겸 동부 군관구 참모 | 후와 히로시 | 대좌 | 육사 39기 |
제12방면군 겸 동부 군관구 참모 | 이타가키 토오루 | 중좌 | 육사 42기 |
근위 제1사단장 | 모리 타케시(森赳) | 중장 | 육사 28기, 살해됨 |
근위 제1사단 참모장 | 미즈타니 이치세이(水谷一生) | 대좌 | 육사 33기 |
근위 제1사단 참모 | 이시하라 사다키치(石原貞吉) | 소좌 | 육사 47기, 순직 |
근위 제1사단 참모 | 미조구치 마사히로(溝口昌弘) | 소좌 | 육사 49기, 황태자(현 상황) 경비 지도를 위해 닛코에 출장 |
근위 제1사단 참모 | 코가 히데마사(古賀秀正) | 소좌 | 육사 52기, 관련 자결 |
근위보병 제2연대장 | 하가 토요지로(芳賀豊次郎) | 대좌 | 육사 28기 |
3. 1. 정부
직책 | 이름 | 비고 |
---|---|---|
천황 | 쇼와 천황 | |
총리대신 | 스즈키 간타로 | 전 시종장, 해군병학교 14기 |
육군대신 | 아난 미키 | 전 시종무관, 육군사관학교 18기 |
해군대신 | 요나이 미쓰마사 | 전 총리대신, 해군병학교 29기 |
외무대신 | 토고 시게노부 | |
궁내대신 | 이시와타 쇼타로 |
3. 2. 육군성/참모본부
일본 육군성은 회의 결정을 알고, 계속 저항하려는 많은 장교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45년 8월 12일 자정 이후 샌프란시스코의 라디오 방송국(KGEI)이 연합군의 답변을 전달했는데, 연합군이 일본 정부의 국체 보호 요청에 반대하여 일본 정부의 주권과 천황의 권위를 연합군 사령부에 종속시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이는 패망한 독일 제국에도 적용되었던 군정 체제였다(점령하의 독일). 일본 외무성은 이를 주권 제약으로 해석했지만, 일본 육군은 이를 더욱 노예화로 해석했다.[1] 1945년 8월 13일 새벽 3시부터 천황 측근 회의 참석자들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항복에 동의했지만, 동시에 열릴 예정이었던 내각 회의는 동의하지 않았다. 또한, 전쟁지휘 최고회의는 국체 보호 문제로 혼란을 겪었다. 이러한 절차 이후, 일부 육군 장교들은 국체 보호를 위해 쿠데타가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이때 이들 장교의 핵심 그룹은 이미 도쿄에 일부 병력을 준비해 두었다.[1]1945년 8월 12일 늦은 밤, 하타나카 켄지 소령은 이다 마사타카 중령, 다케시타 마사히코 중령(아나미 고레치카의 처남), 이나바 마사오 중령, 그리고 군무과장 아라오 오키카츠 대령과 함께 아나미 고레치카(육군 장관이자 "천황 자신을 제외하고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2]와 만나 포츠담 선언의 수용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나미 장군은 젊은 장교들의 반역을 도울 것인지 여부를 거부했다.[3] 그들의 지지가 절실했지만, 하타나카와 다른 반란군들은 스스로 쿠데타를 계획하고 시도할 수밖에 없다고 결정했다. 하타나카는 8월 13일 대부분의 시간과 14일 아침을 동맹을 모으고 육군성 고위층의 지지를 얻고 음모를 정교화하는 데 보냈다.[4]
1945년 8월 13일에서 14일 밤에 열린 천황 측근 회의에서 항복이 최종적으로 결정된 직후, 아나미는 항복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명한 두 차례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에게 "쿠데타를 감행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가"라고 물었고, 우메즈는 "이제 천황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2] 그런 다음 아나미는 화장실에서 하야시 사부로 대령과 대면하여 "도쿄 외곽에 있다는 소문이 있는 대규모 미군 수송대를 공격할 가능성"에 대해 질문했다. 하야시는 수송대의 존재가 단지 소문일 뿐이라고 언급하면서 천황의 결정을 재확인함으로써 아나미의 제안을 일축했다.[2] 마지막으로 그의 처남인 다케시타 마사히코 중령은 아나미와 대면하여 먼저 아나미의 사임을 제안했는데, 이는 정부 붕괴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리고 쿠데타를 지지할 것을 제안했다. 첫 번째 제안에 대해 아나미는 정부 붕괴가 천황의 칙령을 막을 수 없다고 언급했고, 두 번째 제안에 대해서는 먼저 육군성으로 가고 싶다고 답했다.[2]
육군성에서 아나미는 천황의 칙령에 따를 것이라고 발표했다.[2] 그런 다음 아나미를 포함한 고위 육군 장교들이 근처 방에 모였다. 참석자들은 모두 항복을 막기 위한 쿠데타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고, 참석자 중 일부는 쿠데타를 고려했을 수도 있다. 침묵 후, 일본 육군참모본부 부총장 가와베 도라시로 장군은 참석한 모든 고위 장교들이 천황의 항복 명령을 수행하기로 합의하는 서약서에 서명할 것을 제안했다—"육군은 천황의 결정에 따라 끝까지 행동할 것이다." 육군성 차관 와카마쓰 타다이치도 참석하여 문서 작성을 도왔다. 이 문서는 참석한 가장 중요한 장교들 모두가 서명했다. 서명자는 육군 장관 아나미,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제1군 사령관 스기야마 하지메 원수, 제2군 사령관 하타 준로쿠 원수, 군사훈련 감찰관 도이하라 켄지였다. 우메즈가 공군 부대의 문제 발생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자, 와카마쓰는 항공총군 사령부로 가서 사령관 가와베 마사카즈(도라시로의 형제)도 서명하게 했다. 육군 최고위 장교들의 이러한 서면 합의는 아나미의 발표와 함께 도쿄에서 쿠데타를 선동하려는 어떤 시도에도 강력한 방화벽 역할을 했다.[5]
이 사건과 관련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인물 | 직책 | 계급 | 비고 |
---|---|---|---|
메이진 미지로 | 참모총장 | 대장 | 육사 15기 |
도조 히데키 | 전 총리 | 대장 | 육사 17기 |
아라오 오키타다 | 일본 육군성군무국 군사과장 | 대좌 | 육사 35기, 관련 |
이나바 마사오 | 육군성 군무국 군사과 편제반장 | 중좌 | 육사 42기, 관련 |
이다 마사타카 | 육군성 군무국 군사과원 | 중좌 | 육사 45기, 주모, 자결 단념 |
타케시타 마사히코 | 육군성 군무국 군무과 내정반장 | 중좌 | 육사 42기, 발단 문서 작성 |
시이자키 지로 | 육군성 군무국 군무과원 | 중좌 | 육사 45기, 주모, 실패 후 자결 |
하타나카 켄지 | 육군성 군무국 군무과원 | 소좌 | 육사 46기, 주모, 실패 후 자결 |
3. 3. 제12방면군 겸 동부 군관구
직책 | 이름 | 비고 |
---|---|---|
사령관 | 다나카 시즈이치 대장 | 육사 19기, 반란 진압 지휘 |
참모장 | 타카시마 다쓰히코 소장 | 육사 30기 수석 |
참모부장 | 오누마 하루오 소장 | 육사 32기 |
참모 | 후와 히로시 대좌 | 육사 39기 |
참모 | 이타가키 토오루 중좌 | 육사 42기 |
3. 4. 근위 제1사단
직위 | 이름 | 비고 |
---|---|---|
사단장 | 모리 타케시(森赳) | 중장, 육사 28기, 살해됨 |
참모장 | 미즈타니 이치세이(水谷一生) | 대좌, 육사 33기 |
참모 | 이시하라 사다키치(石原貞吉) | 소좌, 육사 47기, 순직 |
참모 | 미조구치 마사히로(溝口昌弘) | 소좌, 육사 49기, 황태자(현 상황) 경비 지도를 위해 닛코에 출장 |
참모 | 코가 히데마사(古賀秀正) | 소좌, 육사 52기, 관련 자결 |
근위보병 제2연대장 | 하가 토요지로(芳賀豊次郎) | 대좌, 육사 28기 |
4. 쿠데타 시도
1945년 8월 14일 밤부터 15일 새벽까지, 하타나카 겐지 소좌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21시 30분경, 하타나카는 동부방면군 및 근위사단 사령관들이 쿠데타에 가담했다고 속여 제1근위사단 제2연대 사령관 하가 도요지로 대령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다나카 시즈이치(田中静一) 동부방면군 사령관 설득에는 실패했다. 하타나카는 궁궐 점령을 통해 육군이 항복 결정에 반대하여 일어설 것이라고 기대하며 02시에 근위대를 동원하여 궁궐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은 할복했다.
01시 이후, 하타나카와 그의 부하들은 모리 다케시(森赳) 근위사단장을 찾아가 쿠데타 참여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그를 살해했다. 우에하라 시게타로 대위는 시라이시 미치노리를 살해했다. 하타나카는 모리 장군의 도장을 사용하여 허위 명령(제584호 근위사단 작전 명령)을 내려 궁궐과 궁내청을 점령하고 황제를 "보호"하려는 병력을 증강했다. 궁궐 경찰은 무장 해제되었고 모든 출입구가 차단되었다. 반란군은 옥음방송 녹음본을 찾기 위해 이시와타 소타로(石渡荘太郎) 궁내청 장관, 키도 고이치(木戸幸一) 관인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도쿠가와 요시히로(徳川義寛) 시종장은 녹음본의 위치를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다. 반란군은 전화선을 절단하여 궁궐 경내와 외부 세계의 통신을 차단했다.
같은 시각, 요코하마에서 사사키 다케오 대위가 이끄는 반란군이 스즈키 간타로 수상의 사무실과 자택,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郎) 추밀원 의장의 자택을 습격하여 암살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03시경, 이다 마사타카(伊達正隆) 중좌는 동부방면군이 쿠데타를 저지하려 한다는 소식을 하타나카에게 전했다. 하타나카는 NHK 라디오 방송 시간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하가 대령은 하타나카에게 궁궐 경내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05시 직전, 하타나카는 NHK 스튜디오에서 방송 시간을 확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동부방면군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후 항복했다. 새벽이 되자 다나카는 궁궐이 침입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궁궐로 가서 반란 장교들을 비난하며 병영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했다. 08시까지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고, 녹음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하타나카와 시이자키 지로는 오토바이와 말을 타고 거리를 질주하며 전단지를 뿌렸다. 8월 15일 11시경, 하타나카는 권총으로 자결했고, 시이자키도 자결했다. 하타나카의 주머니에는 "이제 황제 폐하의 치세에서 먹구름이 사라졌으니 후회할 것이 없다."라는 유서가 있었다.
4. 1. 쿠데타 모의 및 준비 (8월 12일 ~ 14일)
1945년 8월 12일 밤, 하타나카 겐지 소좌는 이다 마사타카 중좌, 다케시타 마사히코 중령(아나미의 처남), 이나바 마사오 중령, 그리고 군무과장 아라오 오키카츠 대좌와 함께 아나미 육군대신을 만나 포츠담 선언 수용을 막기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아나미 대신은 이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지지가 절실했던 하타나카와 다른 반란 주동자들은 결국 스스로 쿠데타를 계획하고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하타나카는 8월 13일 대부분의 시간과 14일 아침을 동조자를 모으고 육군성 고위층의 지지를 얻으며 쿠데타 계획을 구체화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8월 13일에서 14일 밤, 천황 주재 회의에서 항복이 최종 결정된 직후, 아나미는 항복에 반대하는 두 차례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우메즈 요시지로 육군참모총장에게 "쿠데타를 감행해서라도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가"라고 물었으나, 우메즈는 "천황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아나미는 하야시 사부로 대령에게 미군 수송대 공격 가능성을 질문했으나, 하야시는 소문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마지막으로 처남인 다케시타 마사히코 중령이 아나미에게 사임을 통한 정부 붕괴와 쿠데타 지지를 제안했으나, 아나미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
육군성에서 아나미는 천황의 칙령에 따를 것을 발표했다. 이후 아나미를 포함한 고위 육군 장교들이 모여 항복을 막기 위한 쿠데타 가능성을 우려했다. 침묵 후, 가와베 도라시로 일본 육군참모본부 부총장은 모든 고위 장교들이 천황의 항복 명령을 수행하기로 합의하는 서약서에 서명할 것을 제안했다. "육군은 천황의 결정에 따라 끝까지 행동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이 문서에는 아나미 육군대신, 우메즈 육군참모총장, 스기야마 하지메 제1군 사령관, 하타 슌로쿠 제2군 사령관, 도이하라 겐지 군사훈련 감찰관 등 주요 장교들이 서명했다. 와카마쓰 다다이치 육군성 차관은 가와베 마사카즈 항공총군 사령관에게도 서명을 받았다. 육군 최고위 장교들의 이러한 서면 합의는 아나미의 발표와 함께 쿠데타 시도를 막는 강력한 방화벽 역할을 했다.
어전회의의 결정을 통보받은 육군성에서는 항전을 주장하던 많은 장교들이 격렬하게 반발했다. 포츠담 선언의 "'''전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5]이라는 항목은 육해군 조직의 존망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오전 9시 육군성 회의에서, 아나미 육상대신은 "불복하는 자는 먼저 이 아나미를 베라"고 말하며 진정을 시도했다.
8월 12일 0시 무렵,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연합국의 답신을 방송했다. 이 안에는 일본 정부의 국체 유지 요청에 대해, "천황과 일본 정부의 국가 통치 권한은 연합국 최고 사령관에 따르는 ('''subject to''') 것으로 한다"고 답변되어 있었다. 외무성은 이 문장을 "'''제한 하에 놓이는'''"으로 번역했지만, 육군에서는 "'''예속하는 것으로 한다'''"고 해석하며 천황의 지위가 보장되지 않았다고 여겨 전쟁 계속을 주장했다.[6] 불만을 가진 장교들의 지도자이자 아나미 육상대신의 처남이었던 다케시타 마사히코 중좌는 아나미 육상대신에게 종전 저지를 요구했고, 더 나아가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할복할 것을 강요했다.
각의에서 끝까지 포츠담 선언 수용에 반대했던 것은 육군 대표인 아나미 육상대신, 마쓰사카 히로마사 사법대신, 아베 모토키 내무대신 3명이었다.
15시 각의에서 마침내 답신 수용이 결정되었다. 육상대신 관저로 돌아온 아나미 육상대신은 6명의 장교(군사과장 아라오 오키미쓰 대좌, 동과원 이나바 마사오 중좌, 동과원 이다 마사타카 중좌, 군무과원 타케시타 마사히코 중좌, 동과원 시이자키 지로 중좌, 동과원 하타나카 겐지 소좌)에게 면담을 요청받고, 쿠데타 계획에 대한 동의를 강요받았다. "병력 사용 계획"에서는 동부군 및 근위 제1사단을 이용하여 궁성을 격리하고, 정부 요인들을 체포하여 계엄령을 발포하고, 국체 유지를 연합국 측이 승인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한다고 적혀 있었다. 면담을 요구한 6명은 모두 참모나 내정반장으로, 최전선의 상황을 잘 알지 못했다. 아나미 육상대신은 그들에게 "우메즈 참모총장을 만난 후 결심을 전하겠다"고 답변하고 일행을 해산시켰다.
오전 7시, 육군성에서 아나미 육상대신과 우메즈 참모총장의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우메즈는 쿠데타 계획에 반대했고, 아나미도 동의했다.
정오 무렵, 고문서 보관소에서 열린 회의에서 쇼와 천황은 연합국의 답변 수락을 승인하고, 필요하다면 자신이 국민에게 직접 호소해도 좋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자 회의는 끝났다. 쇼와 천황의 눈물에 감동한 아나미 육상대신은 포츠담 선언 수락을 용인하고, 쿠데타 계획을 멈추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바로 후에 아나미 육상대신이 육군성에서 몰려드는 젊은 장교들에게 성단을 전달하자, 장교 중 한 명이었던 하타나카는 주위 사람들이 겁먹을 정도로 통곡했다고 한다.
13시경, 일본방송협회의 오하시 하치로 회장은 내각정보국에 불려가 “종전 칙서가 천황 폐하의 직접 방송이 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긴급히 준비를 갖추도록” 지시를 받았다. 같은 무렵, 다케시타와 하타나카는 고가 히데마사 소좌와 함께, 육상대신과 참모총장에게 부정당한 쿠데타 계획안을 대체할 대안인 「병력사용 제2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15시 무렵, 아나미 육상대신은 육군성에서 육군 과원 이상을 제1회의실에 모아 육군의 무조건 항복 수용을 알리고, “여러분은 조급한 옥쇄(玉碎)가 임무를 해결하는 길이 아님을 잘 생각하고, 진흙을 먹고, 들판에 엎드려서라도 끝까지 황국(皇國) 유지를 위해 분투해 주기 바란다”고 훈시했다. 이 자리에 하타나카는 없었고, 이때 동부군관구 사령부에서 사령관인 다나카 시즈이치 대장을 만나려 하고 있었다. 그는 동부군의 쿠데타 참여를 요청할 예정이었지만, 방에 들어가자마자 다나카에게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위축되어 굴러 떨어지듯 방을 나왔다.
22시 무렵, 하타나카는 이다를 만나, 이다의 육군대학교 시절 스승인 모리 다케시 사단장의 설득을 부탁했다.
23시, 각의가 끝나고 중립국 스위스를 통해 연합국 측에 포츠담 선언 수락을 통고했다. 쇼와 천황의 옥음방송 녹음은 23시 30분부터 궁내성 정무실에서 이루어졌고, 옥음반은 도쿠가와 요시히로 시종에게 건네져, 황후궁직 사무실 내의 경금고에 보관되었다.
4. 2. 궁성 점거 및 요인 암살 시도 (8월 14일 밤 ~ 15일 새벽)

8월 14일 21시 30분경, 하타나카 마사오(畑中正雄)의 반란군은 제1근위사단 제2연대를 동원하여 궁궐 경내를 점거했다. 하타나카는 모리 타케시(森赳) 근위사단장을 살해하고, 허위 명령을 통해 부대를 동원했다.[8] 반란군은 옥음방송 녹음본을 찾기 위해 궁내청을 수색했으나 실패했다.
같은 시각,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사사키 다케오(佐々木武雄) 대위가 이끄는 다른 반란군이 스즈키 간타로 총리의 사무실과 자택,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郎) 추밀원 의장의 자택을 습격하여 암살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10]
4. 3. 진압 (8월 15일 새벽 ~ 아침)
다나카 시즈이치|田中일본어 동부군 사령관은 오전 5시경, 부하 몇 명만 데리고 친위근위사단 사령부로 직접 가서 위조된 명령으로 부대를 배치하려던 근위보병제1연대장 와타나베 타료(渡辺多粮)를 제지했다.[9] 연대장 옆에 있던 근위사단 참모 이시하라 사다키치(石原貞吉) 소좌는 동부헌병대에 의해 신변이 보호되었다.[9]오전 6시가 조금 지나 쿠데타 발생 소식을 들은 쇼와 천황은 "자신이 직접 병사들 앞에 나가 타일러야 한다"고 말했다.[11] 그 무렵, 육상성 관저에서는 아나미 육상대신이 자결했다.[11]
다나카는 가마몬(乾門) 부근에서 호가를 만나 병사들의 철수를 명령한 후, 고문서(御文庫)와 궁내성(宮内省)으로 가 반란 진압을 알렸다.
방송회관에서는 하타나카가 동부군에 전화로 결의 방송 허가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부대를 철수시켰다.[10] 수비대 사령부에서는 구금되었던 시모무라 정보국 총재(下村情報局総裁) 등이 석방되었다.
오전 8시 전에는 근위보병 제2연대 병사들이 궁성(宮城)에서 철수했고, 궁내성 지하실에 숨어 있던 이시와타리 궁상(石渡宮相)과 기도 고이치 내부대신은 그곳을 나왔다.
5. 쿠데타 실패 이후
쿠데타 진압 이후, 사건 관련자들은 각기 다른 행적을 보였다. 핵심 가담자인 이다 마사타카(井田正孝)는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전후 덴츠에서 근무했다. 이나바 마사오(稲葉正夫)는 방위청과 방위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군법 위반 행위에도 불구하고 군 조직 해체로 인해 처벌받지 않았다.[1]
5. 1. 전후 처리
궁성 사건 진압의 공로자인 다나카 시즈이치(田中静壱) 사령관은 1945년 8월 24일 밤 권총으로 자살했다. 다나카는 전시 중 궁궐에 대한 공습을 허용한 것 등에 책임을 느끼고 있었으며, 같은 날 발생한 육군통신학교 교관 구보타 켄조(窪田兼三) 소좌와 육군예과사관학교 학생들에 의한 가와구치 방송국 점거 사건 해결을 기다려 행동한 것이었다.[1]근위 제1사단 참모 이시하라 사다키치(石原貞吉) 소좌는 1945년 8월 15일에 발생한 미토 교도항공통신사단 사건의 일부인 우에노 공원 점거 사건 당시 제12방면군 참모 칸노 토시오(神野敏夫) 중좌로부터 설득 요청을 받았다. 이는 미토에서 상경한 부대의 지휘관 오카지마 테츠(岡島哲) 소좌가 이시하라의 육군사관학교 본과 교련반장 시절 제자였기 때문이었다.[1]
1945년 8월 19일 도쿄미술학교에 간 이시하라 소좌는 설득에 응하지 않은 하야시 요시노리(林慶紀) 소위에게 권총으로 사살되었다. 이시하라의 시체는 같은 날 밤 근위 제1사단 사령부 소속 헌병인 사카이 요시로(境芳郎) 헌병조장에 의해 수습되었다. 전후 이시하라는 훈4등에 서임되었고,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에도 합사되었다.[1]
한편, 모리 다케시(森赳) 사단장 살해의 핵심 인물이자 병력 사용 계획에 관여했던 이다 마사타카(井田正孝) 중좌는 1945년 8월 15일 육군성에서 자살하려 했으나, 감시 장교에 의해 저지당했다. 전후에는 덴츠(電通)에 입사하여 총무부장과 관련 회사인 덴츠 영화사의 상무를 역임했다. 1955년에 이혼하고 이와타(岩田)로 복성했다. 마찬가지로 병력 사용 계획에 관여했던 이나바 마사오(稲葉正夫)는 방위청 전사편찬관을 거쳐 방위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1]
사건에 관련된 장교들은 당시 군법·형법에 명백히 위반되는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패전으로 그들을 재판해야 할 군 조직이 해체되었기 때문에 군사재판에 회부되거나 형사 책임을 묻지 않았다.[1]
5. 2. 관련 작품
- 영화 《일본 패망 하루 전》
- 『패망하지 않다』(1954년, 아베 유타카 감독, 신토호)
- 『황실과 전쟁과 우리 민족』(1960년, 코모리 하쿠 감독, 신토호)[12]
- 『8월 15일의 폭동』(1962년, 코바야시 츠네오 감독, 도에이)[13]
- 『일본의 가장 긴 날』(1967년,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 도호)
- 『일본의 가장 긴 날』(2015년, 하라다 마토 감독, 쇼치쿠)
- 가가 오츠히코(加賀乙彦) 『돌아오지 않는 여름(帰らざる夏)』 고단샤(講談社)〈고단샤 현대문고(講談社現代文庫)〉, ISBN 4061962353
- : 후반부 스토리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 『역사의 눈물』(1980년 2월 25일, TBS, 텔레비전맨 유니온)
-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결단』・「25화 최후의 결단」( 1971년 9월 25일, 일본TV, 타츠노코 프로덕션)
- 『일본의 가장 긴 날』(2022년, 반도우 카즈토시 원작, 호시노 요시노부 작화)[14]
참조
[1]
서적
Journey To The Missouri
https://archive.org/[...]
Yale University Press
2023-05-07
[2]
웹사이트
終戦反対事件 日本大百科全書
https://kotobank.jp/[...]
[3]
문서
1945年5月25日の東京大空襲によって明治宮殿が焼失した後、昭和天皇の住居は鉄筋コンクリート製の御文庫に移された。この付近の地下には地下壕も構築されており、終戦時の最高戦争指導会議および御前会議などはここで開催されている。
[4]
웹사이트
ポツダム宣言受諾に関する交渉記録
https://www.ndl.go.j[...]
国立国会図書館
[5]
웹사이트
憲法条文・重要文書 日本国憲法の誕生
https://www.ndl.go.j[...]
国立国会図書館
2024-08-24
[6]
웹사이트
玉音放送までの「日本のいちばん長い日」、タイムラインが物語る「戦争を終わらせる難しさ」
https://www.yomiuri.[...]
読売新聞社
2024-08-14
[7]
서적
終戦クーデター 近衛師団長殺害事件の謎
[8]
서적
川口放送所占拠事件秘史
[9]
웹사이트
終戦秘話:8月15日に近衛師団戦車中隊に起こったこと
http://www.nanmoku.n[...]
2020-07-10
[10]
서적
放送ばなし アナウンサア十年
青山商店出版部
1946
[11]
서적
終戦クーデター 近衛師団長殺害事件の謎
[12]
웹사이트
皇室と戦争とわが民族 : 作品情報
https://eiga.com/mov[...]
映画.com
2024-08-24
[13]
웹사이트
八月十五日の動乱 : 作品情報
https://eiga.com/mov[...]
映画.com
2024-08-24
[14]
웹사이트
検索 NDLサーチ 国立国会図書館
https://ndlsearch.nd[...]
国立国会図書館
202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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